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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s pictureShinuh Lee

[연재] 바이러스로 멈춘 소리, 침묵 그리고 영감(靈感)

Updated: Dec 18, 2020

이신우교수의 음악이야기 <8> 이신우의 카프리스(Caprice) 제1번 '꽃'

궂은 날씨가 지난 후 필자의 정원에 핀 꽃


필자는 재직 중인 학교로부터 연구년을 허락받아 지난 2월부터 영국에 체류하고 있다. 현지에 도착하여 정착할 즈음 한국에 코로나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이후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적 전염병으로 번져 3월말부터 수개월 간 영국 전역이 전면 봉쇄되었다.


영국 날씨는 늦은 봄까지도 매우 변화무쌍하고 사납다. 하루에 거의 대부분의 날씨를 모두 경험해 볼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인데도 어둡고 컴컴한 하늘, 무거운 공기, 내리뿌리는 비,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속의 바람,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살며시 얼굴을 내미는 해, 다시 급변하며 갑작스레 떨어지는 빗방울, 바람, 어둠.


바이러스로 봉쇄된 도시에는 인적이 없고 그 분위기가 기괴하기까지 했다. 을씨년스럽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영국 날씨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바이러스로 인한 도시 봉쇄가 어우러진 수개월은 작곡가인 필자의 인생에서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하게 된, 몸과 마음에 특별히 선명하게 기억된 시간들이다.


도시가 전면 봉쇄된 기간 동안 생필품을 사러 나갈 수 있었던 일주일에 하루 두어 시간 정도를 제외하고 바깥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유일하게 우리 집의 조그마한 정원을 통해서였다. 도시가 멈추고 소리가 멈추고 사람들의 활동이 멈추었다. 침묵, 고요... 주변의 모든 것이 멈춘 그 순간, 신비하게도 조금씩 선명해져가는 어떤 소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작은 정원을 통해 연결된 외부로부터 들려지는 “자연”의 소리였다. 바람소리, 새소리, 빗방울소리... 눈, 코, 귀, 피부, 오감을 통해 느껴지는 공기,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구름, 캄캄한 밤하늘, 빛, 그리고 마음 속 깊이 울리는 주님의 말씀.


24시간 갇힌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던 필자는 제한된 공간 내에서도 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창조적 일들, 즉 각기 다른 시각, 날씨 속에서 들려지는 자연의 소리들을 녹음하는 동시에 이 시간 속에 느낀 작곡가적 심상(心象)을 오선지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여느 날처럼 비 오고 우울한 어느 하루, 거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심히 스케치 해나가던 음표들은 어느 새 하나 둘씩 모여 시간의 여정을 통해 새로운 곡(曲)으로 태어났다. 바이올린을 위한 카프리스 제1번 《꽃》은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현의 음색, 활의 운궁법(運弓法)에 의한 현과 활의 다양한 마찰로 빚어지는 소리들은, 눈과 귀, 온 몸과 마음으로 느낀 이 시간들에 대한 작곡가의 소회(所懷)이자 기록이다.


이 곡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꽃》이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전염병으로 인해 침체된 음울한 도시 분위기와 시간 속, 이따금씩 비치는 해와 궂은 날씨 속에서도 어느 샌가 자라난 풀과 꽃처럼 이 작품에는 적지 않은 은유(隱喩)들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고 연주할 것인가는 온전히 연주자의 몫이며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한 온전히 감상자의 몫이다. 예술 작품 고유의 추상성이 지닌 매력이자 특권이다. 바이러스로 세계 클래식 음악계 전반이 멈춰서 있기에 이 작품의 실제 소리는 아직 작곡가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며, 악보에 그려진 음표와 여러 기호 속에 은밀히 봉인되어 있다.


이 곳 영국에서 필자는 현재까지 세 작품을 썼다. 카프리스 제1번 《꽃》과, 지난 호에 기고한 판소리를 소재로 한 카프리스 제2번 《적벽赤壁》, 그리고 1866년 대동강가에서 순교한 웨일즈 선교사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목사의 삶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아리아 《들으소서, 나의 사랑하는 자여! Hear me my beloved!》가 그것이다. 세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모두 다소 무겁다. 이 특별한 시기, 한국이 아닌 영국 땅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생각과 관점, 감정들이 들어있고, 이는 필자의 최근 기독공보 칼럼에서도 동일하다.


한국은 바이러스로 인해 도시를 전면적으로 봉쇄한 적이 없고 또한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 수가 불과 약 삼백 명을 웃돌기에 사망자가 사만 명이 넘고 수개월 동안 쥐죽은 듯 봉쇄된 숨 막히는 도시를 경험한 이 곳 영국에서 느끼는 것과는 아마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는 번져가고 사망자는 늘어가고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문인은 글로, 화가는 그림으로, 작곡가는 소리로 각자 고유의 관점에 비추어 시대와 정신을 기록한다. 다양한 도구와 관점에서 태어난 이 기록들은 세월이 흘러 우리가 이 시간들을 어떻게 느끼고 이해하고 감내하며 지나왔는지 비춰주는 거울이자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출처 : 한국기독공보 http://www.pck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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