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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Shinuh Lee

現代音樂을 듣는 즐거움

작곡가 姜碩熙를 생각하는 音樂的 산책


이 흥 우


나는 좋은 음악을 들으며 오락성 이상의 더 깊은 체험을 찾는다. 나는 새로운 음악을 들으며 우리에게는 아직도 음악적 체험의 미개지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체험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뇌세포의 집단 속에, 지혜의 탑을 쌓듯이 새로운 행복의 질, 생활의 질을 발견하게 된다


(중략)


李信雨의 소리


  1999년 봄, 李信雨(이신우·서울대 음대 교수) 작곡의 「PSALM(詩篇) 20」(1994/96, 98년 개작, 오케스트라)을 CD로 들으면서 「상대적으로 훨씬 더 옛것들이 보수되며 미묘하게 새로운 것과 결부되어 발휘되는 힘」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처음에(제1악장) 심발의 가격(加擊)으로 시작되는 몇 소절의 멜로디와 리듬이, 제금, 징, 꽹과리 등의 금속타악기가 신이 들린 듯 울리는 굿거리 장단처럼 들린다. 타악기의 금속성이 도중에서 관현의 소리와 만나기도 하고, 같은 주제가 오케스트라와, 드럼의 웅장한 반복으로 강조되기도 한다. 소음처럼 엇갈리는 소리들 사이로 민감한 소리의 조각들이 짧고 묘하게 교감하고 대응하기도 한다. 나긋나긋한 짧은 관의 지속음이 문득 나타나다가, 다시 처음의 주제가 더 짧은 호흡으로 斷續(단속)된다.


  2악장은 작은 북소리에 유도되듯 관악기들의 부드럽게 이어지는 섬세한 멜로디의 제2주제가 나타나, 오케스트라로 증폭되고 반복과 변용을 거듭하다가, 다시 심발의 제1주제가 끼여들며 두 개의 주제가 자꾸 변화하고 교차되며 클라이맥스를 향한다. 때때로 소리의 폭이 변화하는 여운들이 끌고 또 끌다가, 문득 고조되고 다시 간절하게 잦아든다. 「야훼여! 우리 임금에게 승리를 주소서.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도우소서」(시편 20편의 끝절, 공동번역).


  나는 처음에 울리는 그 가락을 조선의 굿거리 장단처럼 들었는데, 사실은 이스라엘의 옛 음악의 멜로디라고 한다. BC 1000년 전후에, 예루살렘에 그런 민속음악이 한창 왕성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나, 그것은 가장 이스라엘적인, 곧 가장 민족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의 가장 민족적인 굿거리 장단과도 유사한 것이다. 그런 것을 인간의 핏줄의 박동과도 같은 소리의 장단의 보편적인 공통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시편 20장」은 곤경(환난의 날)에서 그들(對敵者)을 이기고자, 지휘자를 위해, 하느님께 빌며 찬양하는 다윗의 찬가이다(다윗은 BC 1000년에 유대의 왕, BC 964년에는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 되었다). 그 끝 부분에는 「(그들은) 혹은 兵車(병거)와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옛 번역)라는 말이 있다. 이 부분을 신·구교의 「공동번역」에서는 「누구는 병거를 믿고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나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이 사람들은 휘청거려 쓰러지겠지만 우리는 꿋꿋이 선 채 넘어지지 않사옵니다」라고 했다. 이것을 더 현대적으로 「혹은 탱크 혹은 미사일을 의지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믿습니다. 저들은 넘어지고 엎드러지며 우리는 일어나 똑바로 섭니다」라고 번안할 수도 있다.


  시편 20편의 첫머리는 「야훼께 비옵니다」(공동번역)로 시작된다. 조선 굿판의 굿거리의 첫 장단은 우선 『아하 우리 대감』을 부르는 소리처럼 들리며, 계속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듯이 강약, 강약 등의 끈질긴 리듬이 계속된다. 기독교의 야훼 하나님이 유일신인데 비해, 무속은 多神的(다신적)이다. 옥황상제에서 터줏대감, 부엌의 신, 문간의 신, 관운장, 최영, 임경업 장군 등, 수많은 신들이 있는 것이다.


  「PSALM(詩篇) 20」의 첫 심발소리는(제1주제), 邪祈福(벽사기복)의 「아하 우리 대감이 아니시리」라는 조선의 굿거리 장단처럼도 들리는 아주 민족적인 소리이다. 그것이 야훼 하나님의, 더 보편적인 소리로 상승하며, 간혹 담대하게 증폭되고, 다시 온유하고 섬세한 절제와, 다양한 변용을 거듭하며, 바람에 흔들리고 폭풍도 부는 들판의 풀잎이나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과 나비들처럼 노래하며 祈願(기원)한다. 그렇게, 간절하고 온유하고, 고조되는 듯 절제되는 현대적인 기원의 찬가가 이루어진다.


  李信雨의 20대 초반의 작품인 「아날로지」(1991, 독주 오보와 작은 앙상블을 위한, 7분 49초)는 이 작곡가의 미묘하게 섬세한 재능을 일찍부터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음악이다. 「PSALM 20」은 그보다는 더 대범하고 대담한 요소가 투입된 작품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민족적인 소리에 깃들이면서, 세계적인 것으로, 깃을 떠나 산야와 꽃밭을 날아다니는 벌이나 나비처럼, 변용되며 환골탈태해서 새롭게 태어난다. 옛것들이 보수되며 새것과 결부되어 미묘한 새로운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李信雨의 「Pot’ae-p’yong(保太平) in 1997」(1996/7, 약 10분)은, 姜碩熙의 「달하」가 현대의 「수재천」인 것처럼, 「현대(1997년)의 보태평」이다. 종묘제례악의 보태평지악은 지극히 문화적인(後代의 王이 先代의 王들의 文治를 기리는) 음악이다. 「보태평」은 음악에 통달한 세종대왕이 53세(보통나이, 세종 31년) 때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연례악이었는데 나중 세조 때부터 종묘제례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한일합방 후, 일제가 조선의 아악을 살리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조사를 하러온 일본의 한 음악학자는 보태평의 奠弊熙文(전폐희문)을 듣고 천상에 오르는 것 같은 음악이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ASKO앙상블이 연주하는 李信雨의 「오늘의 보태평」은 拍(박)의 일격으로 시작되며 바순의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절묘한, 평화로운 멜로디가 생성되어, 고비와 굽이를 흘러예듯 주제를 이끌며 발전해간다. 앙상블의 감싸는 듯한 소리들이 들어오며 간간이 숨을 끊었다가(休止), 때로는 절규처럼 날카롭게, 그리고 마냥 부드럽게 엇갈리며 풀려나간다. 「보태평지악」 11곡의 에센스를 추출해서 다시 釀成(양성)해낸 것도 같다.


  조선초의 「保太平」을 재현(대개 劣惡化)한 유사품이 아니다. 보태평, 옛 예악의 정신이 오늘의, 李信雨의 소리로써 인간의 더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며, 새로운 것으로서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1997년, 지금, 우리들의 동시대의 보태평이다. 그 아름답고 그윽하고 평화스러운 소리들 사이에, 문득, 문득, 맺고 끊는 「박」이 쳐울려진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뜻밖에, 그러나 즐겁게 귀보다도 등덜미까지를 때린다. 그것은 옛것들의 지층을 뚫고 나오는, 생기에 찬 새로운 소리이다.


  나는 간혹 예수나 석가의 당시의 말들도 소중하지만, 만일 예수나 석가가, 새로운 정보들이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다면 어떤 말들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李信雨의 「1997년의 보태평」을 들으며, 세종의 음악적 재질이 1997년에 20대로 환생했다면 이런 「보태평」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석가나 예수 이후의 현대까지의 유사종교의 제창자들의 희극성은, 그 이후의 새로운 정보가 거듭 축적된 시대에, 어리석게도 훨씬 더 그들만 못한 말들을 한다는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중략)



출처 : 월간조선 http://month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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