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년으로 영국에 나와 있던 중에 선생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근 사십 여년 가까이 선생님을 지척에서 뵈었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을 곁에서 지키지 못해 너무나 죄송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추모의 메시지로 대신하면서 선생님의 사진들을 찾노라니, 제자로, 작곡가로, 같은 학교의 동료로 선생님과 함께 한 수많은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건 제가 중학교 2학년이던 1982년이었습니다. 열세 살 제 눈에 비친 선생님은 예술가이면서 과학자 같고, 어찌 보면 발명가 같기도 하고, 당시 제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정말 크고 독특한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뵌 이후 저는 작곡가라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음악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상상이 아니라 실제 ‘강석희’라는 작곡가의 존재를 눈앞에서 보았고, 또한 선생님을 통해 조금이나마 엿 본 창작이라는 세계가 열세 살 중학생이던 제게 너무나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보였으니까요.
서울대학에 입학하고 당시 강클래스라 불리는 선생님 문하에서 보낸 대학 4년은 제 인생에 가장 신나고, 재밌고, 창작에 대한 에너지로 가득했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더구나 강클래스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너무나 특이하고 재미있었지요. 아마도 제가 가장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는 강클래스의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워낙 특이한 사람들로 가득했기에 ‘평범한 사람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라는 조금은 괴상한 오기 또한 제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개성 넘치는 클래스의 중심에는 항상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작곡하는 법을 처음부터 세세히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저희가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이를 작품으로 흡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지요. 선생님의 교육 방식은 학생들을 창의적인 사고와 대화에 노출시킴으로, 학생 스스로 작품을 논리적으로 구성해 나갈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도록 지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연구실 테이블에 악보를 길게 펴 놓고 장시간동안 진행되었던 클래스 세미나는 강클래스만의 독특한 시간이었습니다. 1학년 때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던 것들이 이 시간들을 통해 터득이 되고, 또한 자신의 작품으로 연결되니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방학 때면 늘 저희들을 데리고 강원도로 남해로 동해로 클래스 캠프를 떠나셨지요. 선생님과 함께 했던 이 모든 시간들은 저희 안에 작곡가로서의 창작의 에너지가 숙성해가는 일종의 배움의 과정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종종 음악을 건축물에 비유하곤 하셨습니다. 작곡은 세밀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늘 말씀하셨고 음악적 논리와 구조에 대해 강조하셨죠. 제가 학부 3, 4학년 때 쓴 현악사중주 《맥脈》과 트리오 《공간》을 선생님께서 얼마나 긴 시간동안 곡의 세부와 구성에 관해 면밀히 지도해 주셨는지 여전히 기억합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저는 큰 구조 안에서 음악을 구축해 나가는 동시에, 작품에 사용된 모든 요소를 세밀하게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익혔습니다. 후에 제 음악어법이 바뀌고 선생님 문하에 있을 때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쓸 때, 다양한 요소들을 다양식적으로 변용하면서 이를 어떻게 구성해 나가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논리와 구조, 음악을 구축하는 기술 등, 제 음악의 근간은 모두 선생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이라는 것을요.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에 그 위에서 제가 훗날 자유롭게 제 음악언어를 찾아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재료로 음악을 써도 일종의 구성적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논리와 구조에 대한 학부시절 선생님의 철저한 가르침 덕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한때 제게는 제 작품에 대한 선생님의 평가가 정말 두려웠던 때도 있었습니다. 1998년,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한 음도 쓸 수 없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당시 류재준, 최우정과 함께 영산아트홀에서의 작곡발표회를 앞두고 있었는데, 그간 제가 배워온 것들과 써 온 어법들을 모두 버리고, 가보지 않은 길로 제 음악언어를 찾아 어렵게 첫 발을 뗀 곡을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제게 어법의 방향이나 완성도에 대한 확신이 있을 리가 만무했지요. 선생님께서는 첫 시도였던 부족하고 어설픈 작품을 들어주시고, 그 어법 자체로 인정해 주시고, 작가로서의 제 결정을 말없이 존중해 주셨습니다. 이 작품의 부족함을 견디지 못했다면 저는 아마 그간 배워온 것들을 버리고 제 자신의 음악언어를 찾아 떠나는 용기를 결코 다시 내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1980, 90년대는 선생님께서 작곡가로 예술감독으로, 한국과 전 세계를 무대로 가장 활발히 활동하시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ISCM 부회장직을 수행하시면서 범음악제를 통해 세계의 현대음악과 현대음악가들을 한국에 소개하셨지요. 지금처럼 해외에서 연주되는 음악들을 쉽게 접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범음악제를 통해 선생님께서 쏟아내신 현대음악들은 젊은 작곡가들과 한국현대음악계에 그야말로 엄청난 활력이었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예술, 음악에 대한 경험을 중시하셨던 선생님 문하에서 매 해마다 범음악제를 통해 다양한 현대음악을 접하고 세계의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저희들이 작곡가로서 성장해 나가는 데 정말로 귀중한 자양분이었습니다.
《부루 Buru》나 《달하 Dalha》, 《카테나 Catena》, 《피아노협주곡》 등과 같은 선생님의 주요 작품들이 이미 세계 여러 무대에서 연주되고 있었지만 저는 특별히 선생님께서 서울대학을 정년퇴임하신 후 작곡하신 작품들이 참 좋았습니다. 《모자이쿰 비지오 Mosaicum Visio》, 《오 텔 미 O Tell Me》, 《평창의 사계 Four Seasons of PyeongChang》 에는 선생님께서 후기 작품들을 통해 추구하셨던 빛과 색, 의성어 등에 대한 선생님의 관점과 흥미로운 음악적 시도들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이전 작품보다 훨씬 가볍고 빠르고, 다채로운 색과 아이디어들로 충만한 이 작품들을 볼 때 정년하신 후에도 어떻게 이렇게 이전보다 더 생생하고 생동감 있는, 창조적 에너지로 가득 찬 작품을 끊임없이 써내실 수 있는지 내심 감탄하곤 했습니다. 《평창의 사계》는 작품을 위촉한 세종솔로이스츠에 의해 뉴욕 카네기홀과 런던 카도간홀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공연장에서 연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2014년 선생님의 80회 생신을 기념하여 열린 서울대학의 스튜디오2021에서 연주되고 스튜디오2021에디션에서 악보로도 출판되었으니 이 작품은 제게도 참으로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작곡가로 교육자로 현대음악기획자로 절정기에 있었던 시기뿐만 아니라, 퇴임 후 작품에 보다 집중하셨던 때와 그 이후 병상에서 안타깝게도 작곡을 하지 못하고 힘겹게 투병하신 시간들 대부분을 선생님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이 곳 영국에서 한동안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한 시대에 큰 획을 남긴 예술가를 스승으로 모셨던 영광과 행운을 넘어, 예술가 강석희답게 전 생애를 치열하게 사신 선생님을 사십 여년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제 인생에 큰 배움이자 말할 수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삶 전체를 통해 예술가로, 교육자로, 큰 가르침을 주고 떠나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저 또한 작곡가로 교육자로 더욱 치열하게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존경과 감사, 사랑을 담아
2020년 8월 20일
이신우 올림
* 강석희 선생님을 추모하며 음악춘추 2020년 9월호에 실린 특별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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